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엥겔스 (문단 편집) === 다시 맨체스터로 === 1849년 엥겔스가 런던으로 망명에 성공한 이후, 카를 마르크스도 아내 예니 마르크스를 데리고 런던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마르크스 부부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는데, 1849~1850년 당시는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를 도와줄 수 없는 처지였다.[* 아버지 몰래 용돈을 부쳐오던 엥겔스 어머니마저, 엥겔스의 혁명 활동 때문에 가족들이 고초를 겪자 "내가 볼 때는 죄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상을 퍼트리고 다니는 아들한테 왜 재정지원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구나."라고 힐난하며 용돈을 끊어버렸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 부부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이 기도가 영양결핍과 잦은 이사로 병을 얻어 사망하자, 엥겔스는 결국 친구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가족들과 화해하고 맨체스터 사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 친애하는 엥겔스 선생님[*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쓸 때 항상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은 정기적으로 연봉의 절반 이상을 마르크스 가족에게 나눠줬다. 엥겔스가 회사 일을 했던 20년간 그 총액은 3000-4000파운드(현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5-6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그에게 돈을 더 달라는 편지를 부칠때마다 "솔직히 정말이지 자네한테 이런 편지를 쓰느니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네. 반평생을 남한테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건 정말이지 정신이 피폐해지는 일이야"같은 미사여구를 사용하곤 했다. >---- >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엥겔스 평전 /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의 아버지는 엥겔스가 무신론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다시 가족 사업에 뛰어드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엥겔스 가문의 맨체스터 사업장 "에르멘 앤 엥겔스"는 한 편으로는 사업이 번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업자들 사이에 내분이 심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엥겔스의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엥겔스 가문의 몫을 동업자들이 모조리 가로챌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결국 엥겔스는 에르맨 앤 엥겔스 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에르만 가문 동업자들은 엥겔스의 복귀를 탐탁치 않아하며 그를 따돌렸지만, 엥겔스는 유럽 대륙에서 갈고 닦았던 정치력이 있었고[* 엥겔스의 일생 중 1844~48년 기간은 다른 혁명가들과 견제와 권력 다툼의 연속이었고, 영국에 올라왔을 당시 엥겔스 역시 권모술수라면 도가 튼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에르멘 가문 동업자들의 내분에 빠진 빈틈을 이용해 회계 장부들을 꼼꼼히 점검하면서, 그동안 에르멘 동업자들이 마음놓고 떼먹던 이익금 상당수를 아버지에게 부쳐주는 데 성공했다. 엥겔스가 사업에 성실하게 몸담으면서 절연 직전까지 갔던 부자 관계도 회복되었고 엥겔스는 회사 수익금의 7.5%를 배당받는 주요 임원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한편 맨체스터 시는 엥겔스가 떠나 있던 몇 년 사이 빠르게 변해 있었다. 빈곤 문제가 극심하던 맨체스터 시는 1846년 영국 [[곡물법]]이 폐지되면서 노동자들이 더 저렴한 가격에 식료품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영국 면직물이 중국과 호주 등으로 수출되면서 커다란 호황을 누리면서 신흥 중산층들이 성장하는 단계가 되었고 오물로 뒤덮여있던 도로가 새로 포장되고, 빈민가가 있던 자리에는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엥겔스는 자신이 맨체스터를 바탕으로 저술했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가 몇 년 만에 구닥다리 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엥겔스의 공장 역시 노동자들의 처우가 과거보다 많이 개선된 상황이었고[* 여담으로 엥겔스의 공장은 1871년 벤클리프의 질병장례공제조합 보고서에 따르면 맨체스터 내에서 가장 급료가 좋고 근로조건이 안정적인 공장으로 알려졌다 한다.] 이러한 여건 하에 엥겔스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본론 말마따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여 얻은 자본"을 친구 마르크스의 생계비로 보태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엥겔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노동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다시 자본가 사회로 복귀한 이유는 친구 마르크스의 생계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마르크스 지원은 일반적인 우정만으로 설명되기 힘든 것이었다. 에르멘 앤 엥겔스 사로 복귀한 초창기에는 아직 엥겔스 역시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아 충분한 급료를 받기 이전이었지만, 엥겔스는 월급날마다 마르크스 가족들에게 뭉칫돈을 보내주었다. 엥겔스 평전의 저자 트리스트럼 헌트에 따르면, 엥겔스는 동업자 고드프리 에르멘이 사무실을 비우고 없을 때는 금고에서 우편환이나 우표, 5파운드짜리 지폐를 비롯해 몇 파운드씩 슬쩍해 보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쇼핑조차 귀찮아하던 마르크스를 위해 식료품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보내기도 하고, 마르크스 딸들의 생일 선물까지 꼬박꼬박 챙겨줬다. 딱 한 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이가 나빠진 적이 있었는데, 아내가 죽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편지를 썼는데 마르크스가 답장에 돈 좀 꿔달라는 말을 써 넣어 엥겔스가 폭발한 것이다. 마르크스 본인은 무신론자였어도 어머니가 신실한 [[유대교]] [[랍비]] 가문이었던 영향으로 성 문제에 있어서 다소 보수적이라, 자신의 친구 엥겔스가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아일랜드인 출신 문맹하고 [[사실혼]] 관계였던 것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심결에 그동안 도와주던 친구 심경을 긁어놓으니 사달이 났던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